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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옛 동리길 문화탐방

극적루(克敵樓)

위치 봉산동 8-6, 현 봉산로터리 인근

지금은 탐방중! 시내권 문화탐방 > 극적루(克敵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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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1359년(공민왕 8)과 1361년(공민왕 10)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 침입
    홍건적(紅⼱賊): 원나라 말기 하북성(河北省)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군
  •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에 송도 함락
    안성에서 북쪽으로 30여 주는 풍문만 듣고도 항복
  •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 안성 통과,
    안성 사람들은 홍건적 (적장)괴수 6명을 일시에 처단
    『관련 기록(안성시지 1권) 홍건적이 안성을 통과할 때, 안성 사람들은 일부러 항복한 척하며 잔치를 벌여 음식과 술을 차려 홍건적을 먹인 후 술에 취해 쓰러진 홍건적 괴수 6명을 일시에 처단했다. 그리고 이 일로 홍건적은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한 채 철군하고 말았다』
  • 1362년(공민왕 11) 공을 인정받아 안성은 군으로 승격
    수주(수원)의 양량(陽良), 감미탄(⽢彌呑), 마전(⾺⽥), 신곡(薪⾕) 등 4개의 부곡이 안성에 편입
  • 1363년(공민왕 12) 지군사(知郡事-군수) 신인도가 누각 건립
    『 건립위치: 후대의 기록을 통해 극적루의 터를 추적해 보면, 그 위치는 현재의 안성시교육지원청 부지 내가 된다. 현재 안성시교육지원청과 안성초등학교 부지 는 조선 시대에 안성군의 동헌(東軒)과 객사 등 각종 관아 시설이 소재하던 곳이다. 1993년도 안성문화원의 조사에서는 극적루터로 추정되는 곳에 흩어져 있던 한 변이 1m가 넘는 대형 주초석이 확인되기도 했다』
  • 1398년 군수 정수홍(鄭守弘)이 누각 수리하고 극적루라 명명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 10, 안성군 누정 권근(權近, 1352~1409)은 당시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지정 신축년(1361, 공민왕 10), 홍건적에 송도가 함락되고 승여(乘輿)가 파천했 을때 이 고을(안성)에서 북쪽으로 30여 주는 풍문만 듣고도 항복했다. 심지어는 공 복을 갖추고 나가서 맞이하기도 했다. 하늘까지 뒤덮을 듯한 기세가 남으로 넘치니 장차 온 나라가 같이 망해도 막을 수 없었는데, 오직 이 고을이 남보다 의기를 분발 해 항복하는 체하며 잔치를 벌여 적군을 호궤(犒饋)했다. 적이 취한 다음 섬멸하니 적은 다시 남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그리해 국가는 흥복(興復)하는 공을 성취할 수 있었다. 이 고을의 의기와 공렬을 표창해 지관(知官)으로 승격시켰다』
  •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사이 멸실 추정
    『멸실 추정 근거 : 15세기의 동국여지승람에서 극적루의 존재가 확인되는 만큼, 대체로 누정은 17세 기를 전후해 멸실(滅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시기 안성은 왜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지역으로 당시에 극적루가 멸실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 2011년 11월 23일 ‘극적루 복원사업 추진위원회’ 구성
  • 2012년 10월 착공(총 사업비 6억)
  • 2013년 6월 완공, 같은 해 10월 1일(화) 오후 4시 준공식

의의

  • 극적루(克敵樓)는 “적을 이겼다”는 의미의 누정(樓亭)으로 홍건적 10만 대 군의 남하를 막아낸 안성 사람들의 공훈을 기념해 세웠다. 당시 다른 일부 고을의 수령들은 홍건적이 온다는 말만 듣고도 도망가거나 항복했다. 그러나 안성 사람들은 지혜롭게 적을 상대해서 적장(괴수) 6명을 처단하고 홍건적의 남하를 저지했다. 이는 단순히 안성 고을을 살린 것이 아닌 당시 고려를 살린 대단한 공적이며, 안성 사람들의 기개와 구국의 저항정신을 잘 보여주는 역사이다. 또한 극적루의 역사 속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을 세운 특정 인물이 부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거사를 계획하고 지도했 다면 그의 이름이 역사에 등장해야 정상이지만 안성의 홍건적 격퇴를 다룬 어떤 문헌에도 개인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때의 승 리가 특정 인물이 아닌 안성 사람들이, 안성의 민초들이 힘을 모아 이뤄낸 공동체의 공이었음을 반증한다. 이러한 안성 민초들의 저항정신은 동학과 의병, 독립항쟁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극적루의 역사를 알고 배운다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안성 사람들이 가 진 자랑스러운 안성의 정신을 알고 배우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용자료]

  • 안성시지 제1권(2011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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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내권 문화탐방 > 극적루(克敵樓)를 탐방하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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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1359년(공민왕 8)과 1361년(공민왕 10)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 침입
    홍건적(紅⼱賊): 원나라 말기 하북성(河北省)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군
  •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에 송도 함락
    안성에서 북쪽으로 30여 주는 풍문만 듣고도 항복
  •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 안성 통과,
    안성 사람들은 홍건적 (적장)괴수 6명을 일시에 처단
    『관련 기록(안성시지 1권) 홍건적이 안성을 통과할 때, 안성 사람들은 일부러 항복한 척하며 잔치를 벌여 음식과 술을 차려 홍건적을 먹인 후 술에 취해 쓰러진 홍건적 괴수 6명을 일시에 처단했다. 그리고 이 일로 홍건적은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한 채 철군하고 말았다』
  • 1362년(공민왕 11) 공을 인정받아 안성은 군으로 승격
    수주(수원)의 양량(陽良), 감미탄(⽢彌呑), 마전(⾺⽥), 신곡(薪⾕) 등 4개의 부곡이 안성에 편입
  • 1363년(공민왕 12) 지군사(知郡事-군수) 신인도가 누각 건립
    『 건립위치: 후대의 기록을 통해 극적루의 터를 추적해 보면, 그 위치는 현재의 안성시교육지원청 부지 내가 된다. 현재 안성시교육지원청과 안성초등학교 부지 는 조선 시대에 안성군의 동헌(東軒)과 객사 등 각종 관아 시설이 소재하던 곳이다. 1993년도 안성문화원의 조사에서는 극적루터로 추정되는 곳에 흩어져 있던 한 변이 1m가 넘는 대형 주초석이 확인되기도 했다』
  • 1398년 군수 정수홍(鄭守弘)이 누각 수리하고 극적루라 명명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 10, 안성군 누정 권근(權近, 1352~1409)은 당시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지정 신축년(1361, 공민왕 10), 홍건적에 송도가 함락되고 승여(乘輿)가 파천했 을때 이 고을(안성)에서 북쪽으로 30여 주는 풍문만 듣고도 항복했다. 심지어는 공 복을 갖추고 나가서 맞이하기도 했다. 하늘까지 뒤덮을 듯한 기세가 남으로 넘치니 장차 온 나라가 같이 망해도 막을 수 없었는데, 오직 이 고을이 남보다 의기를 분발 해 항복하는 체하며 잔치를 벌여 적군을 호궤(犒饋)했다. 적이 취한 다음 섬멸하니 적은 다시 남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그리해 국가는 흥복(興復)하는 공을 성취할 수 있었다. 이 고을의 의기와 공렬을 표창해 지관(知官)으로 승격시켰다』
  •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사이 멸실 추정
    『멸실 추정 근거 : 15세기의 동국여지승람에서 극적루의 존재가 확인되는 만큼, 대체로 누정은 17세 기를 전후해 멸실(滅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시기 안성은 왜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지역으로 당시에 극적루가 멸실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 2011년 11월 23일 ‘극적루 복원사업 추진위원회’ 구성
  • 2012년 10월 착공(총 사업비 6억)
  • 2013년 6월 완공, 같은 해 10월 1일(화) 오후 4시 준공식

의의

  • 극적루(克敵樓)는 “적을 이겼다”는 의미의 누정(樓亭)으로 홍건적 10만 대 군의 남하를 막아낸 안성 사람들의 공훈을 기념해 세웠다. 당시 다른 일부 고을의 수령들은 홍건적이 온다는 말만 듣고도 도망가거나 항복했다. 그러나 안성 사람들은 지혜롭게 적을 상대해서 적장(괴수) 6명을 처단하고 홍건적의 남하를 저지했다. 이는 단순히 안성 고을을 살린 것이 아닌 당시 고려를 살린 대단한 공적이며, 안성 사람들의 기개와 구국의 저항정신을 잘 보여주는 역사이다. 또한 극적루의 역사 속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을 세운 특정 인물이 부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거사를 계획하고 지도했 다면 그의 이름이 역사에 등장해야 정상이지만 안성의 홍건적 격퇴를 다룬 어떤 문헌에도 개인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때의 승 리가 특정 인물이 아닌 안성 사람들이, 안성의 민초들이 힘을 모아 이뤄낸 공동체의 공이었음을 반증한다. 이러한 안성 민초들의 저항정신은 동학과 의병, 독립항쟁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극적루의 역사를 알고 배운다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안성 사람들이 가 진 자랑스러운 안성의 정신을 알고 배우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용자료]

  • 안성시지 제1권(2011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역사 속
'이 달의 안성'

안성복음회 주최 교회 간 친목 모임 | 김태영이라는 인물이 1920년 9월, 동양선교회 안성복음회가 주최한 교회 간 친목 모임을 주선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친목이 아닌, 민족 교육에 기반한 근대 계몽 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해요. 당시 안성에서는 청년야학회 설립, 문맹 퇴치 운동, 운동회 개최 등 다양한 형태의 교육 · 사회운동이 활발히 전개 중이었고, 김태영의 노력은 이를 촉진하는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역사와 추억이 살아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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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이 달의 안성'

안성복음회 주최 교회 간 친목 모임 | 김태영이라는 인물이 1920년 9월, 동양선교회 안성복음회가 주최한 교회 간 친목 모임을 주선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친목이 아닌, 민족 교육에 기반한 근대 계몽 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해요. 당시 안성에서는 청년야학회 설립, 문맹 퇴치 운동, 운동회 개최 등 다양한 형태의 교육 · 사회운동이 활발히 전개 중이었고, 김태영의 노력은 이를 촉진하는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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