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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옛 동리길 문화탐방

옛 안성시장길

위치 장기1길 154 ↔ 추억의 6070거리까지 장기1길 일대

지금은 탐방중! 시내권 문화탐방 > 옛 안성시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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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의의

  • 안성은 예로부터 장시가 발달하여 연암 박지원은 18세기 후반 「허생전」 에서 안성을 경상, 전라, 충청도 삼남의 물화가 모여 서울로 이송되는 길목이라 하였다. 허생전에서 허생은 서울의 제일 부자 변씨에게 1만 냥을 빌려, 모든 물건이 서울로 가는 길목인 안성장에서 과일을 매점매석하여 큰 돈을 벌었다. 또 이중환은 1750년경 택리지에서 "안성은 경기도와 호서지방 해협사이에 위치하여 화물이 수용되고 공인과 상인이 모여 들어 한남의 도회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안성장의 번성을 확인 할 수 있는 자료는 비변사등록과 조선왕조실록이 있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안성은 삼남의 요충지로서 상업이 활성화되자 도적들도 모여들어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안성군수는 무신으로서 임명했다고 한다. 또한 이 자료를 보면 1703년경에는 전국적으로 시장이 이미 많이 개설되어 있었고 신설시장도 계속해서 열리는 시장의 중흥기라고 볼 수 있으며, 이때 안성장은 경기도 최고의 시장으로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47년 비변사등록에는 안성시장이 서소문 외 시장 중에는 가장 크고, 이로 인하여 도적들이 모인다고 하였다. 또 같은 내용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안성장이 한양 안의 시전보다 크다고 하여 안성장이 대시장임을 알 수 있다.
  • 안성장이 경기도 도내에서 다른 지역보다 크게 발달하고 있었음은 도내의 다른 장시들과 비교하여 장세를 월등히 많이 징수하고 있었던 데에서도 알 수 있다. 18세기 초의 기록에 의하면 각 지방의 재정 형편은 어려워 각종 잡세를 징수하여 재정을 충당하고 있었는데 당시 장세를 거둔 곳은 안성, 황주, 전주, 은진 등 4곳 밖에 없을 정도로 안성장은 성행하였으며 『부역실총(賦役實 摠)』에 의하면 안성의 장세는 경기도의 32개 군현 가운데 가장 많은 720 냥이 징수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시대 성행했던 안성시장은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우리 민족 상인들의 힘으로 그 명맥을 유지했다. 안성기략에 따르면 1924년 당시 안성 시장의 상인수는 총 2,069명으로 기록돼 있는데, 이중 95%가 넘는 1,975 명이 우리 민족이었으며 일본인 상인은 3%가 안 되는 54명이었다. 이들 우리 상인들은 일제가 철도를 건설하며 장기리 안성시장 인근이 아닌 지금의 석정동 한경국립대 인근으로 기차역을 설치하려고 하자 힘을 모아 맞서 안성시장 인근에 기차역(안성읍내역)을 설치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번성했던 장기리 안성시장은 6.25당시 폭격으로 기능을 상실하고 지금의 중앙시장, 안성맞춤 시장을 통해 전통시장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관련 안성4·1
독립항쟁사

  • 장기리 안성시장터는 1919년 3월 11일 안성지역 4·1독립항쟁을 시작한 발상지 중 한 곳이다. 3월 11일 독립항쟁을 준비했던 안성공립보통학교 학생 들이 검거되자 같은 날 오후 8시경 안성시장 상인들은 일제히 상가 문을 닫고 시장에 집결해 독립만세를 외치면 독립항쟁을 시작했다.
  • 이후 일제가 군경을 동원해 경계를 강화하고 탄압함에 따라 독립항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3월 29일 장기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던 진공필이 주민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독립항쟁의 불씨는 다시 타올랐다.
  • 3월 30일에는 장기리 안성시장 부근에서 3백여 명의 주민이 모여 독립항쟁을 전개했고 이 항쟁은 주민 1천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실력 독립항쟁으로 확대돼 안성경찰서와 읍내면사무소를 공격·파괴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 또한 3월 31일에도 안성시장을 중심으로 독립항쟁이 전개됐는데 이날 독립 항쟁은 주민 3천여 명이 참여하는 안성독립항쟁사 중 가장 큰 규모의 항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안성시장에서는 4월 1일과 2일에도 다수의 주민이 참여하는 독립항쟁이 전개됐다.

연관 장소

  • 첫번째, 남일제분소 장기1길 116
    일제강점기 눈깔사탕, 십리사탕 등 과자 공장
  • 두번째, 가축시장(우시장) 장기로74번길 36 일대(현 최부자삽결살 식당 일대)
    소, 닭 등 가축을 사고팔던 곳이다. 1910년 발행한 조선지지자료에 보면 안성읍 동리(장기리)에 ⽶廛巨⾥(싸전거리), ⽜廛巨⾥(쇠전거리), 塩廛巨⾥(소금전거리), 津廛巨⾥(津 나루진) 등의 저잣거리가 기록 되어 있다. 현재 안성보건소↔추억의 6070거리 사이에 있는 다리는 당시 소전다리(쇠전 다리)로 불렸다.
  • 싸전 장기1길 56 일대
    쌀과 곡식을 사고팔던 곳이다. 싸전 인근에는 현재도 예전의 창고 형태를 가진 건물이 남아있으며, 지금의 창전동 지명도 쌀 창고가 있는 동네라해서 창전이라 붙여졌다.
  • 어물전 강변로65번길 34-4 일대
    생선 등 어물을 사고팔던 곳이다. 어물전 위치는 싸전거리 길 건너 현재 신 흥빌리지 앞으로 우마차가 회전할 수 있을 만큼 둥근 공터 주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1940년대 후반에는 창신상회, 해창상회, 삼덕상회 등의 어물전이 있었다.
  • 안성기생조합 강변로83번길 31 일대
    관기의 기생조합이 있던 곳이다. 관기는 관청에 소속되어 가무(歌舞)와 기악(技樂) 등을 담당하던 기생으로 여러 방면에서 재능이 뛰어났어야 했다. 기생조합은 일제강점기부터 권번이라 불리었으며 여기서 속한 기생들이 1919년 안성4·1독립항쟁에 적극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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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내권 문화탐방 > 옛 안성시장길을 탐방하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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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의의

  • 안성은 예로부터 장시가 발달하여 연암 박지원은 18세기 후반 「허생전」 에서 안성을 경상, 전라, 충청도 삼남의 물화가 모여 서울로 이송되는 길목이라 하였다. 허생전에서 허생은 서울의 제일 부자 변씨에게 1만 냥을 빌려, 모든 물건이 서울로 가는 길목인 안성장에서 과일을 매점매석하여 큰 돈을 벌었다.
    또 이중환은 1750년경 택리지에서 "안성은 경기도와 호서지방 해협사이에 위치하여 화물이 수용되고 공인과 상인이 모여 들어 한남의 도회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안성장의 번성을 확인 할 수 있는 자료는 비변사등록과 조선왕조실록이 있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안성은 삼남의 요충지로서 상업이 활성화되자 도적들도 모여들어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안성군수는 무신으로서 임명했다고 한다. 또한 이 자료를 보면 1703년경에는 전국적으로 시장이 이미 많이 개설되어 있었고 신설시장도 계속해서 열리는 시장의 중흥기라고 볼 수 있으며, 이때 안성장은 경기도 최고의 시장으로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47년 비변사등록에는 안성시장이 서소문 외 시장 중에는 가장 크고, 이로 인하여 도적들이 모인다고 하였다. 또 같은 내용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안성장이 한양 안의 시전보다 크다고 하여 안성장이 대시장임을 알 수 있다.
  • 안성장이 경기도 도내에서 다른 지역보다 크게 발달하고 있었음은 도내의 다른 장시들과 비교하여 장세를 월등히 많이 징수하고 있었던 데에서도 알 수 있다.
    18세기 초의 기록에 의하면 각 지방의 재정 형편은 어려워 각종 잡세를 징수하여 재정을 충당하고 있었는데 당시 장세를 거둔 곳은 안성, 황주, 전주, 은진 등 4곳 밖에 없을 정도로 안성장은 성행하였으며 『부역실총(賦役實 摠)』에 의하면 안성의 장세는 경기도의 32개 군현 가운데 가장 많은 720 냥이 징수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시대 성행했던 안성시장은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우리 민족 상인들의 힘으로 그 명맥을 유지했다. 안성기략에 따르면 1924년 당시 안성 시장의 상인수는 총 2,069명으로 기록돼 있는데, 이중 95%가 넘는 1,975 명이 우리 민족이었으며 일본인 상인은 3%가 안 되는 54명이었다.
    이들 우리 상인들은 일제가 철도를 건설하며 장기리 안성시장 인근이 아닌 지금의 석정동 한경국립대 인근으로 기차역을 설치하려고 하자 힘을 모아 맞서 안성시장 인근에 기차역(안성읍내역)을 설치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번성했던 장기리 안성시장은 6.25당시 폭격으로 기능을 상실하고 지금의 중앙시장, 안성맞춤 시장을 통해 전통시장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관련 안성4·1독립항쟁사

  • 장기리 안성시장터는 1919년 3월 11일 안성지역 4·1독립항쟁을 시작한 발상지 중 한 곳이다. 3월 11일 독립항쟁을 준비했던 안성공립보통학교 학생 들이 검거되자 같은 날 오후 8시경 안성시장 상인들은 일제히 상가 문을 닫고 시장에 집결해 독립만세를 외치면 독립항쟁을 시작했다.
  • 이후 일제가 군경을 동원해 경계를 강화하고 탄압함에 따라 독립항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3월 29일 장기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던 진공필이 주민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독립항쟁의 불씨는 다시 타올랐다.
  • 3월 30일에는 장기리 안성시장 부근에서 3백여 명의 주민이 모여 독립항쟁을 전개했고 이 항쟁은 주민 1천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실력 독립항쟁으로 확대돼 안성경찰서와 읍내면사무소를 공격·파괴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 또한 3월 31일에도 안성시장을 중심으로 독립항쟁이 전개됐는데 이날 독립 항쟁은 주민 3천여 명이 참여하는 안성독립항쟁사 중 가장 큰 규모의 항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안성시장에서는 4월 1일과 2일에도 다수의 주민이 참여하는 독립항쟁이 전개됐다.

연관 장소

  • 첫번째, 남일제분소 장기1길 116
    일제강점기 눈깔사탕, 십리사탕 등 과자 공장
  • 두번째, 가축시장(우시장)  장기로74번길 36 일대(현 최부자삽결살 식당 일대)
    소, 닭 등 가축을 사고팔던 곳이다. 1910년 발행한 조선지지자료에 보면 안성읍 동리(장기리)에 ⽶廛巨⾥(싸전거리), ⽜廛巨⾥(쇠전거리), 塩廛巨⾥(소금전거리), 津廛巨⾥(津 나루진) 등의 저잣거리가 기록 되어 있다. 현재 안성보건소↔추억의 6070거리 사이에 있는 다리는 당시 소전다리(쇠전 다리)로 불렸다.
  • 싸전 장기1길 56 일대
    쌀과 곡식을 사고팔던 곳이다. 싸전 인근에는 현재도 예전의 창고 형태를 가진 건물이 남아있으며, 지금의 창전동 지명도 쌀 창고가 있는 동네라해서 창전이라 붙여졌다.
  • 어물전 강변로65번길 34-4 일대
    생선 등 어물을 사고팔던 곳이다. 어물전 위치는 싸전거리 길 건너 현재 신 흥빌리지 앞으로 우마차가 회전할 수 있을 만큼 둥근 공터 주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1940년대 후반에는 창신상회, 해창상회, 삼덕상회 등의 어물전이 있었다.
  • 안성기생조합 강변로83번길 31 일대
    관기의 기생조합이 있던 곳이다. 관기는 관청에 소속되어 가무(歌舞)와 기악(技樂) 등을 담당하던 기생으로 여러 방면에서 재능이 뛰어났어야 했다. 기생조합은 일제강점기부터 권번이라 불리었으며 여기서 속한 기생들이 1919년 안성4·1독립항쟁에 적극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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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이 달의 안성'

안성복음회 주최 교회 간 친목 모임 | 김태영이라는 인물이 1920년 9월, 동양선교회 안성복음회가 주최한 교회 간 친목 모임을 주선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친목이 아닌, 민족 교육에 기반한 근대 계몽 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해요. 당시 안성에서는 청년야학회 설립, 문맹 퇴치 운동, 운동회 개최 등 다양한 형태의 교육 · 사회운동이 활발히 전개 중이었고, 김태영의 노력은 이를 촉진하는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역사와 추억이 살아있는

안성문화탐방플랫폼

안성문화원 17596) 경기도 안성시 강변남로 36
(안성문화복지센터 3층)

대표 및 문의전화 031-673-2625
팩스 0504-027-2625 • 메일 cc456a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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